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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Life

이정빈 개인전

Beyond Life

2023. 11. 4. – 25.

지오피 성수
성동구 왕십리로4가길 13 1층
화-토 11am-6pm

이정빈 《Beyond Life》
현대 도자로 전승된 고대의 혼

약 16000년 전, 이 땅의 흙을 모아 주무르던 도공을 생각한다. 그가 손으로 빚던 것은 고온의 가마에 들어가 구워졌다가 다시금 땅에 묻혀 잠들 목적의 도기.1) 즉, 장송의 부장품(副葬品)이다. 도공은 망자의 혼을 위로하고 내세의 평안을 비는 마음으로 흙을 매만졌을 것이다. 당대 유행하던 양식과 기술을 반영하고 풍요와 안녕을 기원할 이야기를 담아 질그릇이며 상형 장식을 만들었을 거다. 완성된 작품은 여타의 껴묻거리와 함께 무덤 안으로 들어가 영면의 길을 걸었다. 소임을 다한 장인들의 이름은 기록에 전해진 바 없으나, 고대의 예술혼이 담긴 그들의 기물을 우리는 지금에 이르러 볼 수 있다.

어느 날 우연한 발견을 통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도기의 모습이 그렇다. 고대의 숨결이 그릇에 응집된 흙과 정성으로 빚어진 그것 외양에 여실히 남아있다. 감동을 넘어선 경외의 무게가 그 오래된 보물에 들어찬다. 다만 일반의 우리에게 아쉬운 것은 이들이 박물관의 유리관 너머나 도록의 사진 정도, 즉 박제된 유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이정빈의 도기는 지금 여기의 즉물적 실체와 역사적 아우라 그 중간에 있다. 이정빈은 현대의 젊은 공예가이면서 시간을 고증하고 복원하는 일에도 관심을 두어왔다. 본래 사진을 전공했던 그는 도자공예의 멋에 매료돼 학부 전공을 추가하고 석사까지 학업을 이어왔는데, 단순히 그릇을 만드는 일보다 도자사(陶瓷史)를 공부하는 것에도 자력의 관심을 두었다. 특히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에 비해 대중의 관심이 적지만, 우리 문화유산으로서 훌륭한 가치를 둔 고대 도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2)

이에 지하 땅속에서 수 세기 세월을 겪은 부장 유물이자, 현대에 출토 뒤 박물관에 수집돼 신진 작가의 눈에 들어온 영감의 원천이 재창작의 기운을 입고 우리 앞의 현전으로 있는 것이다. 이정빈이 본격적으로 공예에 입문한 2018년부터의 작업을 살펴보면, 해마다 도자 재료의 특성을 실험하고 의도적으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공법을 가미한 것이 보인다. 2021년에는 송나라 균요 도자기의 분석과 모방에 주력하며 기법을 익혔고, 이듬해에는 신라·가야의 동물 토우 장식을 따라 자기만의 시그니처라 할 디자인 외형을 만들었다. 석사학위 청구전이 있던 올해에는 개성과 장식성은 조금 줄인 대신 신라·가야의 도기를 세심히 재현하는 데 몰두하면서 토착성을 찾고, 물레성형의 기본을 다시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작가가 취한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특유의 낡으면서도 세련된 공존의 미의식과 재치는 일관되게 점철된 편이다. 예로 2019년 작업 중 드러난 도깨비 모티브를 보자. 그는 지금은 무용하되 한때 동양의 비상한 존재로 모셔졌던 도깨비 관념을 도자 실루엣에 이식하고자 했었다. 물론 모던하고 장식적인 사물로서의 당시 작업에 창작자의 가벼운 내러티브로만 연결되다 말았을 수 있지만, 작품 내외적으로 일종의 개념적 무게를 이식하고 조정하는 기교가 됐고 단발에만 그치지도 않았다. 2021년 백토를 분장한 기(器) 표면에 인터넷 밈(meme)의 텍스트나 낙서화풍의 그림을 그린 데서 작가의 변주가 신성과 세속의 교차 배합으로 더 과감히 진전되고 있음을 증언할 만하다. 3) 2022년에는 고양이 문양을 핸드 빌딩해서 도자 바디에 장식적으로 부착한 작업을 선보였는데, 신라·가야의 토우장식 기물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경주 및 김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토우장식은 죽은 이가 무덤에 안치될 때 다양한 물건과 함께 부장된 것이며 장송의례의 하나이자 주술에 쓰였을 거라 추측되는 바였다. 이들은 7세기 이후 급격하게 감소했는데, 법령의 규제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불교의 도입이 장례 문화를 바꾼 영향일 거라 원인을 추정하고 있다.

과거 토우장식에 사용된 동물은 다양했다. 상상의 동물과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았던 동물까지 포함한 여러 종류의 동물 모양 토우가 단독으로 제작되거나 도기에 부착되었으며, 그 동물 종의 수는 30종에서 47종에 이른다.4) 제각각의 상징성이 무엇인지 모두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죽은 이와 함께 사후세계를 안전하게 동행하고 저승에서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상서로운 의미였을 것은 분명하다. 반면 이정빈이 만들어 온 고양이 모양 토우는 지극히 현세적이다. 알레르기 때문에 고양이를 키우지는 못하지만, 고양이를 보는 것은 좋아한다고 말한 작가다. 이에 일상에서 목격하는 길고양이 모습이나 인스타그램 피드에 노출되곤 하는 고양이 이미지 같은 게 고대의 동물 토우처럼 도기 위에 어울려 얹어졌다. 흙으로 빚은 미니어처 인형이 되고, 그릇 뚜껑이나 손잡이의 기능적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엄숙하고 묵직한 도기 일반에 자율성과 개성, 재미를 준다.

이정빈의 첫 개인전 《Beyond Life》에는 신라·가야의 도기와 상형장식 작업이 소개된다. 석기질 점토에 유약을 불균등하게 발라 일부러 오래된 도기의 느낌을 담아냈다. 밑바닥의 곡선이나 목의 길이 등 전반에 걸쳐 꼼꼼하게 사료를 참고해 원형을 복원했다. <고양이 원저호>처럼 고양이에 모티브를 둔 장식 기물도 전시하지만, <고사리유개 광구호>나 <우각 원저호>처럼 식물 또는 소뿔 장식을 차용하며 고대 양식 복원에 충실한 기물도 공개한다. 수 세기 전, 우리 땅의 흙으로 제작돼 다시 그 흙 속에 묻힌 유물이 오늘 눈앞에 찬란하게 직면해 있는 것 같다. 죽은 자의 안온한 다음 생을 기도했을 어느 도공의 꿈이 천년 여의 시간을 딛고 이렇게 부활하여 나타난 게 아니냐 하면, 과도한 상상일까? 하지만, 인간의 슬픔과 엄숙함으로만 제시되지 않고 그를 초월한 관념의 세계로 나갔던 고대인의 제례를 생각하면 그리 무리한 상상만은 아닌 것 같다. 지금, 우리 시대의 도공과 그의 예술,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보면서 말이다.

글 | 오정은(미술비평)

1) 도자학에서는 흙을 구워 만든 그릇을 소성 온도에 따라 토기(clayware), 도기(earthenware), 석기(stoneware), 자기(porcelain)으로 구분한다. 다만 고고학에서는 도기를 제외한 모든 그릇을 토기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굳혀져 신라도기, 가야도기가 아닌 신라토기, 가야토기로 명칭을 보편화하고 있다. 본 글에서는 도자학의 엄밀한 정의와 작가의 견해를 존중하여 도기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2) 진짜 한국적인 것이 뭘까? 즉, 오리지널리티를 구하는 질문에 이정빈은 스스로 답을 찾으려 한다.
3) 이정빈은 이 연작 작업에 ‘무야호~’, ‘Latte is horse’ 같은 유행어를 필기체로 쓰고 고양이 그림을 낙서처럼 그리고 유약을 발라 MZ문화가 새겨진 조선 초기 분청사기처럼 보이게 구웠다.
4) 관련 내용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행한 전시도록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 상형토기와 토우장식토기』(2023)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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