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Jul SPACE LAG
강이경 개인전
SPACE LAG
2023.07.01. – 07.22.
GOP FACTORY
서울 성동구 연무장19길 7
화-토 11am-6pm
강이경 개인전 《SPACE LAG》
내가 만든 세상
현실이란 무엇인가?
강이경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이라는 개념을 먼저 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을 세상을 보는 우리의 방식 그리고 우리의 관념을 표현하는 개념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회화로 세상을 표현할 때 우리는 과연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일은 우리가 무엇을 현실이라 파악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예술이란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를 밝히는 것에 대한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의 형상화를 통해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관념을 드러낸다. 여기서 ‘표현한다’는 말 대신 ‘드러낸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사실상 우리는 우리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화의 작용도 마찬가지로 그것의 과정을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기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표현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 적합하게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현실과 ‘닮음’이라는 척도로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이경 작가는 우선 한국에서 회화를 배운 후 미국에서 공부하며 판화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디지털 미디어 설치 작업을 함께 하며 회화, 판화, 디지털 미디어 아트, 설치가 함께 공존하는 모습을 만들어 낸다. 앞서 필자가 이야기한 회화란 작위적인 세상의 개념화라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이 재현이든, 추상이든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세상, 또는 세상 속에서 내가 느끼는 것들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과 매우 흡사한 결과물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나의 생각과 내가 느끼는 것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실 그 회화 이미지의 주체는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어쩌면 강이경 작가에게 여러 매체를 활용하여 작업의 범위를 넓히는 일은 세상을 요목조목 다르게 보는 가능성을 확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치 전시장 공간은 강이경 작가 한 사람이 보는 세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 세상을 대변하는 작위적인 전시장 공간 속 예술적 사물들은 작가가 자신이 본 세계를 주장하는 한 방법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강이경 작가가 세상을 인식하고 사물을 인지하는 행위와 같을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는 명확하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면서 세계의 현실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2021년 미국의 한 레지던시에 가게 되었는데, 이곳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주의 암흑물질(暗黑物質, dark matter)과 중성미자(中性微子, neutrino)를 연구하는 과학연구소였다. 실제로 땅 속 1.6km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작가는 그 깊은 땅속에 있는 지하공간을 체험할 수 있었다. 미지의 대상이었던 땅속 세상은 어쩌면 GPS와 지도로만 존재하는 세상이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 수 없을 뿐더러 우리는 땅의 표면에서 단지 그 아래를 상상만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 실제로 들어가게 되면서 그 공간은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은 내가 개념화하거나 지각하지 않아도 존재할까? 만약 그럴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면, 어쩌면 우리가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행위도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거친 ‘나툼’의 행위가 될 것이다.
의식화되기 전의 불분명한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형상화의 작업이 필요하다. 나의 마음도 마치 땅속을 상상하는 것처럼 불분명하다. 이러한 불분명하고 불확실함 속에서 우리는 지상세계를 통해 지하세계를 비교한다. 지상과 지하의 땅 표면을 중간지대(in-between)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보이지 않아 분리해 낸 ‘지하세계’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실재의 세계의 그림자가 되는 현상계와 반대되는 곳이다. 하지만 플라톤의 어법에서 지하세계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실재이고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존재하는 세계이다. 마치 우리가 한 번도 지각하지 못한 우주의 세계를 상상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재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형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일까? 앞에서 필자가 ‘회화란 작위적인 세상의 개념화’라는 표현을 쓰면서 우리는 3차원으로 이해되는 세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회화적 행위를 언급했다. 그런데 내 관념 속 세상을 형상화하는 상상력의 발현이 회화에서 이루어져 있다면, 이 세계는 하나의 단일 우주로서가 아니라 다중우주로서의 세계라 표현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세계는 언제나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으로 만들어지고 있고 그것은 작가가 회화적 표현을 판화를 통해 나타내듯이 닮았지만 다른 세상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복수의 세계는 계속 탄생되면서 동시에 소생한다. 많은 불빛을 내뿜는 LED는 아직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매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어쩌면 이 세상을 원초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만들어내고), 그것을 좀 더 현실화(개념화) 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포스트프로덕션이 아닐까?
이렇게 지하세계에 대한 궁금증과 연결되었던 강이경 작가의 작업에는 ‘글리치(glitch)’가 등장한다. 사실 어찌보면 우리는 지상-지하, 인식-비인식, 인지-탈인지의 수많은 이해 속에서 세상을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순간적으로 등장하는 오작동을 경험한다. 이것은 마치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양방향 변환 속에서 드러나는 출력의 오류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인식의 틀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반대편의 세상은 무조건 오류로 인식될 수 밖에 없다. 강이경 작가는 단순한 오류가 아닌 우리가 각기 다른 대상의 존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 법칙을 대상을 인식하는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그 둘의 ‘중간지대’를 설정한다. 어쩌면 작가는 끊임없이 양분된 것들을 한데 모아 공존을 꾀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한 개만 존재하는 원본성의 회화와 복수성을 가진 판화, 평면의 회화와 판화가 공간 속에 튀어나와 가지게 되는 입체성, 흐르는 시간의 내러티브를 단절하는 조각난 LED 패널 영상들이 사실은 이 모든 것의 중간지대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간지대란 무엇을 의미할까? 중간지대는 단순히 그 무언가 다름이 섞여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이 겹쳐진 하이브리드와는 또 다르다. 강이경 작가에게 중간지대란 아직은 궁금함과 설레임으로 보는 강이경 작가의 세상이다. 작가는 이 세상을 아직 모른다. 하지만 계속해서 던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물음은 아직은 미지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만들어지는 세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김주옥(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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