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May 다가오는 미래, 멀어지는 미래
권군 개인전
다가오는 미래, 멀어지는 미래
2023. 5. 13 – 6. 3.
GOP FACTORY
서울 성동구 연무장19길 7
화-토 11am-6pm
권군 개인전 《다가오는 미래, 멀어지는 미래》
포스트 이클립스: 변화하는 세계의 표식
우리는 변화 위에 서있다. 초고온, 초고압의 맨틀이 흐르고 지각이 부딪히는. 순환하는 대기와 빛의 이동 속에서 우리는 존재로서 다른 존재의 것들과 관계하며 있다. 동시에 살아나고 사멸해간다. 나는 ‘우리는 모두 지의류’라고 한 멀린 셸드레이크(Merlin Sheldrake)의 발견을 참조하여, 공생적 유기체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를테면 얇은 피부 점막 같은 데 침범해 소양감을 내는 균과 그것에 대항하여 분투중일 항체, 탈각된 각질을 양분으로 증식하는 나노 크기 박테리아와 그보다 훨씬 작지만 복제·변이로써 확장해가는 바이러스가 관계하는 인간을 말이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새 인체 내외의 관계망을 확장하며 시간이라는 우주적 개념에 계속 조우한다.
내가 권군을 만난 것을 그런 우주적 개념에 관계하는 두 공생적 유기체의 조응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전시를 위해 미술계와 갤러리가 주선한, 비평가와 미술 작가 간 인터뷰-라고 하면 깔끔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정의다. 나는 일거의 사회적 교류를 빌미로 무수한 분자 개체가 서로 이동하고 순환하면서 변화를 일으키고 또 다른 변성의 촉매제로 작동하는 만남을 상상, 아니 인식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권군은 그런 것을 우연적 특성의 것으로 간단히 지나쳐 버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웠다.
권군은 예전에 내가 본 그녀의 몇몇 전시가 남긴 인상이 그랬듯, 흥미로운 한편 독특했고 그 유별난 사고와 영적인 신념을 생활과 작업에 고루 투영하고 있었다. 번개를 맞고 달의 리듬에 동기화하게 된 체험이라든지, 태양 직관으로 각성하는 신체 수련이 그랬고, 자각몽과 명상 등 초월의식 상태에서 감각하는 세계관, 백남준과 이어진 운명적 연결 고리와 함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작가 활동도 그랬다. 권군은 이번 개인전 《다가오는 미래, 멀어지는 미래》에서 ‘조이(Joy)’를 등장시킨다. 조이는 권군 꿈에 홍색 철쭉 꽃과 함께 등장한 신비한 소녀이자 작가의 어린 자아이면서 인간의 유아적 본성이고 원초적인 감각이다. 신범순 교수는 석판(stone-tablet)을 태초의 창조적 활동이 새겨진 자연의 그림문자로 보고 연구했는데, 1) 이에 기록된 강렬한 사랑의 존재 ‘샤샤 여왕’의 딸 ‘샤샤화 공주’가 바로 조이에 해당한다고 권군은 보고 있다. 꿈에 나온 조이는 울면서 권군을 꾸짖었다. 조이는 종말론적 증후에 경도된 지금 시대의 무기력을 각성시키고 환기한다. 권군의 작업에 등장하는 여타의 도상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오늘날 영매에 준하는 예술가에 의해 번역된 자연 음성에 가깝다. 2) 이에 권군의 작업에는 신화적이고 주술적이며, 비과학적이고 신지학적인 가운데 순수로 회귀한 예술의 좌표가 그려진다. 영겁의 시간에 잠재됐던 환영을 꺼내 직면하고 인식 이면에 공생하는 존재의 이야기를 보고 들음으로써.
권군이 목격한 것을 말하는 방식은 한편의 문학 주체라 할 수 있는 ‘샤샤화 공주’와 마찬가지로 자연 기표로부터 내러티브를 이어가는 수사학, 고대 문자와 같이 상징 기호가 배합된 기하학적 추상, 현실 혹은 환시를 재현하는 매체로써 회화, 그리고 그들이 체현된 사물로서 조각 및 도예의 것들이다. 권군은 2020년 개인전 《난, 무엇을 보는가》와 2021년 개인전 《빼앗긴 시간은 온다》를 통해 이들을 대중에 공개한 바 있다. 각각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권군은 자신이 현시한 세계를 증언하고 자연 본성의 회귀를 주장한다. 흙이나 물감 안료 같은 미술의 기본 재료에 충실한 것은 그녀를 전통적인 미술 작가로서 보이게 하면서도, 작품에 내파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경계의 모호함에 봉착하게 된다. 이 모호함은 다층위적 독해 가능성과 비평의 갈림길로 이어진다. 한 가지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변상증적 환영, 잠재된 의식과 현재를 잇는 아포페니아의 작동이 여러 시간대의 공생적 존재를 작업에 개입시켜 주변을 새롭게 각성시킨다는 것이다. 3) 《다가오는 미래, 멀어지는 미래》는 바로 그 지점에 서있다.
“뒷하늘 열리는 순간.”
노을빛으로 옮겨가는 하늘의 변화, 새로운 세계로의 이정을 도식화한 권군 그림의 표제이기도 한 위 말은 오늘날 희구되는 ‘변혁의 시간’을 강조한다. 4) 권군은 그런 <뒷하늘 열리는 순간>을 이클립스의 여명을 그린 <일식-탈출>과 자연 에너지와 감응한 상태로 그린 <윤슬전류-봄>의 사이에 걸어 전시한다. 생몰의 순환 연대기를 계속 시사하며, 어린 ‘조이’가 석양빛의 샤샤여왕이자 <운주사-할미륵>에 그려진 ‘할미‘ 이후 다시 태어난 존재임을 알린다. 5) 조이가 작가 자아의 또 다른 버전이라는 점에서, 권군이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지정하고 있는지 재차 확인되는 부분이다. 권군은 <공명하는 패턴- Joy의 에테르>와 같이 그것의 비가시적 기운을 패턴화하거나 <포항일출-膣>와 같이 전류반응의 자소상 형태로 표현한다.
권군은 정복의 역사가 써왔던 파괴적이며 권위적이던 과거가 지나고, 섬세하고 치유적인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미래, 멀어지는 미래》는 순환과 재생, 부활과 창조의 변화가 이어지는 미래의 시간과 표식을 확인하는 자리다. 권군은 특히 포스트코로나의 병리적 상황과 이에 대한 항체로서 필요한 것을 조제한다. 이들은 당위적인 믿음에 근거한다. 지금 나는 권군의 그런 믿음을 상상, 아니 인식하고자 한다.●
오정은(미술 비평)
1) 심범순, 『존제생명서판』, Top Process, 2023. 참고.
2) 예술은 영적 세계를 관할하는 샤먼의 특수한 임무와 함께 역사적으로 호응해왔다. ‘창조의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과 특성에 맞게 창조활동을 하는 샤먄들이 있다. 우쥬의 여러 영역들은 이러한 샤먄들에 의해 유지 관리된다.’ 위의 책 p.8에서 인용.
3) 변상증은 벽이나 천정의 얼룩, 구름 등이 사람의 얼굴, 동물 등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포페니아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현상이나 정보에서 규칙성이나 연관성을 추출하려는 인식 작용으로 권군은 이 두 가지 경험을 개인 심리 영역 바깥으로 확대 조직해 나간다.
4) 권군은 이 ‘변혁의 시간’을 백남준의 예견, 이클립스의 각성적 감각, 새로운 시대의 여성적 영성으로 보고 있다.
5) <운주사 할미륵>은 미륵보살상에 이끼가 껴 미륵이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을 목격한 권군이 이를 회화로 재현한 것이다. 미륵은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로 신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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