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Jan ZOOMING IN
<ZOOMING IN>
JIHYUN JUNG
2023. 2. 11 – 3. 4
화 – 토 11 – 6시
Venue : GOP FACTORY
서울시 성동구 연무장19길 7
불투명한 사진이 비추는 것
모든 본질적인 것은 보여져야 한다.
— 카를 프리드리히 쉰켈, 1804
건축사진은 ‘투명성(transparency)’과 불투명성(opacity)’이라는 개념으로 논의되어왔다. 전자는 사진이 건물을 고스란히 전달한다는 성질을, 후자는 사진이 건물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성질을 의미한다. 대조되는 두 개념 가운데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건축사진을 대하는 논의의 향방이 달라진다. 명확한 피사체를 가지지만 삼차원 공간을 이차원 평면으로 담을 수 없다는 건축사진의 천성적인 조건은, 개별 작품을 다루기 앞서 ‘어떤 개념’을 적용할 것인지를 선제적으로 요구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정지현의 작업은 불투명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크스크린 후처리를 통해 피사체와 전혀 다른 색깔과 질감이 덧입혀진 모습은 문자 그대로 ‘불투명한’ 사진이다. 서울시립사진미술관의 건축 과정을 지켜보며 지반을 찍은 <컷슬로프>는 땅의 물성만이 강조되어 정작 장소를 알아보기 어렵고, 송은의 여러 공간을 실크스크린으로 한 화면에 중첩시킨 <Zooming In>은 모호한 형태를 내비치고 있다.
평소 건축주나 건축가로부터 건축 과정을 기록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피사체를 투명하게 담아온 작가의 기존 작업을 떠올린다면 낯설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작가는 짧게는 수개월부터 길게는 몇 년에 걸쳐 건물 곳곳을 찍는 작업을 통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시간대나 공공에게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전달하는 작업을 선보여왔기 때문이다. 많은 노고가 ‘투명하게’ 드러남으로써 거두는 성취였다. 그렇다 보니 투명성의 맥락에서 이번 새로운 시도는 기존 작업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번 불투명한 작업들도 특정 건물을 대상으로 하는 커미션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맥락을 완전히 달리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불투명성을 가한 실크스크린 기법은 ‘송은’의 건축 과정을 기록하는 책을 만들며 이르마 붐이 사진에 가한 그래픽 효과를 시작점으로 두고 있다. 해당 그래픽은 정지현의 ‘투명한’ 사진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스케일과 투시점을 ‘책’이라는 한정된 포맷 안에 균질하게 표현하려는 의도에 바탕을 둔다. 즉, 정지현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은 사진 내적 논리뿐 아니라, 사진이 만들어진 맥락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껏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오간 작업 과정을 총체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실제로 정지현은 수천, 수만 장의 사진 중 몇 장만을 선별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작업의 특성을 언급하고, 통상적인 포트폴리오 사이즈를 그대로 규격 삼아 이러한 물리적 한계를 드러내곤 했다. 대신 이를 부연하는 것은 작품 외적인 설명을 통해서였다. “작가가 촬영하는 현장의 모습을 자꾸 그려보게 된다”(정효섭) 거나 “장면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기록적 성격을 갖는 동시에, (…) 작가의 신체가 개입되며 공간에 물리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수행적 성격”(채연) 과 같은 분석을 통해서야, 비로소 결과물에서 표현되지 못한 지난한 작업 과정이 설명될 수 있었다. 비록 커미션 프로젝트로서 사진이 전하는 정보는 투명했지만, 건축 과정을 비롯한 정지현 작업의 본질적인 부분은 불투명하게 남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투명한 사진에 불투명성을 덧입히는 이번 시도는, 그동안 투명한 사진에서 역설적이게도 불투명했던 부분을 가리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형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은 특성된 피사체에서 벗어나 ‘작업 과정’이나 ‘한눈에 포착하지 못하는 다른 참조점’으로 관람객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예시는 소유(possession) 더하기 지시(reference)” 라는 넬슨 굿맨의 말을 빌리자면, 정지현은 커미션 프로젝트라는 조건에 따라 피사체를 투명하게 소유하는 한편, 이후 불투명성을 만드는 후처리를 통해 (투명한 사진으로는) 미처 보이지 않던 부분을 지시한다. 실크스크린을 통해 두터워진 프레임 안은 프레임 바깥으로 뻗어나가려는 의도다.
사진 역사의 초창기, 한번 촬영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때 언제나 멈춰있는 건물은 ‘건축사진’의 장르적 당위성을 부여해주었지만, 순식간에 사진을 찍고 공유하는 지금에 이르러 건축사진을 재고해야 한다. 이미지 범람과 함께 보여지는 것에 초점 맞춰진 오늘날, 건축사진은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 이때 정지현은 모든 것을 보는 과업을 도맡아, 역설적이게도 이를 불투명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이로써 이 건축사진은 피사체뿐 아니라 그것의 맥락이나 역사를 포함한 다른 부분까지 예시(exemplification)한다. “본질적인 것은 보여져야 한다”는 쉰켈의 말을 상기하자면, 정지현은 분명히 그것들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글/ 최나욱 (미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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